미디어 비평 ‘중립 강박증’에 빠진 한겨레 후배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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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재현기자 댓글 0건 조회 3,716회 작성일 21-02-09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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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주> 

한겨레 후배들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저널리즘적 고민을 담은 글입니다. 이 글은 미디어비평지 <쩌날리즘>에도 실었습니다.




‘중립의 강박증’ 에 빠진 한겨레 후배들에게 <한겨레> 젊은 기자 여러분이 지난달 말 쓴 성명서를 읽어보았습니다. 5년차 이하를 중심으로 현장에서 뛰고 있는 기자들 대부분이 참여했더군요. 제가 2017~2018년 수습기자 취재및기사 교육 책임자였는데 그때 제가 가르쳤던 후배들도 대거 성명에 참여한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후배 여러분이 어떤 마음을 갖고 <한겨레>에 들어왔고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그 눈빛으로 수습교육을 받는 것을 지켜봤기에, 성명서를 쓴 여러분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동의는 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비판적입니다. 여러분의 성명은 한겨레의 미래를 망칠 수 있겠다고 우려하기까지 합니다. 논쟁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이렇게 공개 편지를 씁니다. 다들 아시듯, 제가 본의 아닌 실수로 회사를 나오기는 했지만 제가 <한겨레>에서 쌓아온 경력과 결과물들이 결코 가볍지 않기에, 이 글이 <한겨레> 미래를 위한 집단지성의 밑거름 정도는 될거라는 신뢰 정도는 줄 것이라 믿고 말을 보탭니다. 



□한겨레 기자들 “권력을 비판하는 데 무뎌졌다” 

먼저 후배 여러분의 성명을 요약합니다. 여러분은 “한겨레의 친정권 성향 보도로 무기력감을 느낀다”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몇가지 근거를 들었습니다. △2020년11월25일자 기사에서 추미애 전 법무 장관이 “조국 전 법무장관 사건 재판부의 물의 야기 법관 해당 여부 등을 윤석열 검찰이 조사했다”고 주장했는데 실제 공개된 (사찰)문건에는 ‘조국 재판부의 물의 야기 법관 여부’ 내용은 없었고, <한겨레>는 이에 침묵했다는 것입니다. 이외 △현장의 목소리가 배제되고 찍어 누르기식 발제가 있어왔고 △조국 사태 이후 권력을 검증하고 비판하는 데 점점 무뎌지고 있고 △국장단의 어설픈 정권 감싸기와 모호한 판단으로 ‘좋은 저널리즘’의 가치가 훼손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사회부장 등의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이제 저의 반박입니다. 먼저 추미애 전 법무 장관의 말에 대해 <한겨레>가 정정보도 하지 않았다는 게 사회부장의 사퇴를 요구할 수준의 잘못인지 납득이 안됩니다. 추 장관이 정말 '조국 재판부 물의 야기 법관'이라는 표현을 했다면 그것은 사건 초기, 아직 ‘윤석열 징계위원회’가 열리지 않았고 진상 조사가 완벽하지 않았을 때 나올 수 있는 발언상의 오류로 보입니다. 오류와 오보는 다릅니다. 만약 법관 사찰 문건 자체가 아예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면 <한겨레> 역시 내용을 바로잡는 기사를 쓰는게 맞겠지만, 이 사안은 그렇게까지 볼 사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윤석열 검찰총장이 법원에 청구한 가처분 소송에서의 판사조차 '판사 정보 문건은 부적절하다'고 언급하기까지 했습니다. 현장에서 올리는 기사 발제와 국장의 지시사항이 자꾸 부딪히는데 이 역시 책임을 지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반박합니다. 원칙적으로 데스크가 현장에서 올리는 발제와 사건의 시각을 존중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더 복잡한 지점이 있습니다. 특히 같은 현장이어어도 법조취재현장은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볼 것이 있습니다. 성명에 동참한 분들 중 법조 취재 경험이 있는 분과 그렇지 않은 후배들이 뒤섞여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016~2017년 <한겨레> 법조팀에서 법원과 검찰을 오가며 각종 취재를 해보았습니다. 그때 법조 취재 현장은 일반 사건 취재 현장과 다른 특수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날것 그대로의 정보가 현장에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대로 가공되거나 취사 선택된 정보들이 돌아다니는 게 가장 극단화된 곳이 법조취재현장이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보제공의 권한이 검찰 독점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단독 정보를 입수해도, 대부분은 검찰이 원소스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검찰이 법조기자들의 시각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구조가 그래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추측컨대, 여러분이 비판한 국장단은 이 점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조 현장에서 올라온 발제를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거리두기 하면서 다시 판단하거나 국장단이 다시 취재 주문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장의 목소리를 왜 존중하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과연 여러분이 단독으로 확보해온 그 현장의 목소리가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정보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적어도, 제가 경험했던 법조 취재현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는 '나는 분명 검찰도 감시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위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요. 솔직해집시다. 어떤 대형 수사속보경쟁이 붙었을 때, 아주 사소한 정보라도 단독으로 얻기 위해 검찰에 의존했던 경험이 정말 한번도 없습니까. 검찰 감시의 사명은 속보 경쟁이 붙자마자 물에 젖은 종잇장 같은 것이 됩니다. 아무리 조심히 들고있어도 찢어집니다. 여러분이 저의 이 주장을 부인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거나 법조 취재현장을 잘 모르는 탓으로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물러나라고 한 이춘재 사회부장은 저도 겪어보았습니다. 제가 법조팀 근무할 때 법조팀장이었습니다. 그분의 업무지시 스타일을 잘 압니다. 때로는 권위적이고 일방적입니다. 속에서 천불이 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고 개인적으로는 이춘재 팀장의 스타일에 적응하느라 우울증으로 정신과약도 먹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겪었던 이 팀장은 권위적으로 지시할 수는 있어도, 후배의 합리적 현장 발제에 대해서는 거부한 적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국정농단 사건 재판 취재로 한창 바쁠 때였습니다. 신동욱 공화당 총재가 박근혜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유죄를 받은 재판에서 국정농단 세력의 위증이 있었던 의혹이 있었습니다. 제보자를 설득하러 지방에 내려가야 했는데 도저히 재판 취재를 포기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춘재 팀장은 다소 모험적인 저의 현장 발제를 존중하고 출장을 보내주었습니다. 취재는 최종적으로 실패했지만 팀장은 조금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의 이혼소송과 관련하여 단독으로 확보한 내용들을 라디오에 출연해 설명하려 하자 팀장은 난감해했습니다. 하지만 왜 이 사건이 좀더 대중에게 알려지도록 방송 출연이 필요한지 설득해서 끝내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 성명에 등장하는 이춘재 사회부장의 ‘찍어누르기식 발제와 기사작성 지시’ 가 뭔지 알 거 같습니다. 그러나 다시 묻습니다. 정말 그뿐입니까. 혹시 여러분이 데스크를 탄탄한 팩트와 함께 효과적으로 설득해내지 못한 것을 두고 이 부장의 일방적인 업무지시만을 불만으로 삼는 것은 아닙니까. 권위적인 이춘재 부장은 상상이 되지만, 꽉막힌 이춘재 부장은 제가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권력감시? 어떤 권력에 대한 감시인가? 


역으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한겨레> 데스크가 문재인 정부 권력 감시에 물렀다고 주장했습니다. 묻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누가 탄생시킨 정부입니까. 수구세력입니까, 촛불시민입니까. 아니면, <한겨레>와 아무 상관없는 제3지대의 세력이 만든 정부입니까. 당연히 문재인 정부는 촛불시민의 혁명을 통해 벌어진 과도기적 공간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민주정부입니다. 촛불정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정부입니다. 그렇다면 <한겨레>는 감시해야 합니다. 무엇을? 문재인 정부가 촛불 혁명의 과제를 제대로 이수하는지 말이지요. 그런데 만약 문재인 정부의 각종 개혁정책을 수구세력이 어깃장을 놓고 훼방한다면? 당연히 <한겨레>는 촛불시민의 편에 선 언론으로서 문재인 정부를 옹호해야 하지 않습니까? 촛불혁명을 방어할 수만 있다면 <한겨레>는 기꺼이 친정부 성향을 띄어야 하는 것입니다. 


권력감시는 행정부 권력 감시만 있는 게 아닙니다. 언론권력,재벌권력,검찰권력 등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 않은 다양한 집단이 우리 사회를 과두정치 하듯 이끌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이들이 정부의 개혁을 발목잡으려 한다면 <한겨레>는 매섭게 이들을 비판해야 합니다. 그건 '친정부 언론'의 행보가 아니라 '친촛불 언론의 행보'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명에서 <한겨레> 창간사를 언급했습니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 창간정신을 실천해야 합니다. 저는 <한겨레>를 나와서도 독립언론인으로서 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특정 정치 진영에 매몰되지 말라는 뜻이지 무조건 이를 거부하라는 게 아닙니다. 진보의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정당이나 정치세력의 편에서는 것은 진보언론의 당연한 할 일입니다. 진보지 <가디언>이 대체로 노동당을 지지하지만 블레어 정권이 우경화 할 때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던 이유입니다. 프랑스 좌파신문 <리베라시옹>은 그 뜻 자체가 '해방'입니다. 이렇듯 진보언론이 어떤 정당을 지지하거나, 또는 특정 정치세력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해외 권위지에서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균형강박증에 시달리느라, 가치의 영역에서 중간에 서 있는 건 멍청한 짓입니다. 진보언론은 진보의 가치를 발굴하고 그들의 편에 서 있는 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한겨레>는 노무현 정부를 기본적으로 지지하면서도 한미FTA 졸속 협약 추진과 이라크 파병, 과거세력과의 대연정 제안 등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진보언론으로서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닙니다. 다시 문재인 정부로 돌아와봅시다. 문재인 정부는 진보언론 입장에서 비판할 것과 옹호해줄 것이 뒤섞여 있다는 게 제 분석입니다. 중대재해처벌기본법 등 노동자 문제, 사회양극화 해소와 재벌개혁 문제 등을 분석하면 비판할 것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경제보복까지 감수해가면서 끝까지 위안부 피해여성 할머니들의 인권을 지킨 것은 칭찬해줄 부분이지요. 남북 대화 국면의 조성과 검찰과 경찰 개혁을 뚝심있게 밀고 가는 것은 촛불시민들의 요구였고 이역시 칭찬할 부분입니다. 김학의 전 법무차관 등 각종 과거사 문제나 적폐세력들을 청산하고 법의 단죄를 가한 것은 칭찬할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촛불혁명의 과제를 착착 이수해 가는 문재인 정부를 검찰 등 수구세력이 공격합니다. 어떤 때는 허위사실도 유포합니다. 추미애 전 장관 아들 군휴가 관련 문제가 대표적인 흑색선전이었습니다. 이때 진보언론은 문재인 정부를 비판적 감시해야 한다는 사명감만으로, 흑색선전에 둘러싸여 난타당하는 것까지 내버려두어야 합니까. 열심히 방어해야 합니다. 그건 문재인 정부라서 방어하는 게 아니라, 진보의 가치를 수호하시 위해서인 것입니다. <한겨레> 창간사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어, 여러분이 표현한 '좋은 저널리즘'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좋은'이란 추상적 단어를 쓴다는 점에서 의아했습니다. 가치를 지향하는 언론사에서, 그것도 진보의 가치를 지향하는, 기자들이 더이상 가치가 아닌 도덕지향적 단어를 쓰며 저널리즘 논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철학의 부재일까, 새대의 변화일까. 마치 '바르게 살자' 와 같은 허무한 비석 문구를 본 듯 허망했습니다. <한겨레>는 당연히 '좋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진보 저널리즘'을 추구해야 합니다. 진보는 수식어가 아니라 한겨레의 정체성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듯 <한겨레>가 추구해야 할 진보의 가치(창간정신)는 민주,민족,통일입니다. 만약 이게 싫다면, 후배 여러분은 주주의 동의를 얻어 회사를 새로 구성하든지, 스스로 회사를 떠나는 쪽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과정없이 성명서 한장으로 창간정신을 더이상 실천하지 않는 것은 <한겨레> 창간정신 위배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와 한겨레가 확립한 교훈 


마지막으로 반론제시라기보다는 평소 여러분께 전해주고 싶었던 말씀좀 덧붙입니다. 저는 15년차 기자이니 허리 연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물러나라'고 호소한 사회부장 등 선배 세대와 후배 여러분의 중간에 낀 세대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도 이해하고 선배 세대도 이해하는 편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선배들이 겪어온 경험을 잘 모를 수 있으니 제가 대신 설명해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걸 이해해야만 왜 <한겨레> 국장단이 검찰 수사에 그토록 예민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정치인이든 성역없이 검찰의 수사를 받아야 하고 언론은 이중 잣대로 보도해서는 안된다고요. 맞습니다. 저도 딱 5년차 이하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고민이 딱 거기까지였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태광실업과 관련한 여러 부패 의혹과 검찰 수사를 지켜봤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하여 검찰 수사의 예외를 받아선 안되니까요. 


<한겨레> 구성원 다수가 노무현 대통령의 비리 의혹을 냉정하게 바라봤습니다. “노무현 관장사“는 그런 냉정한 시선의 완곡한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 수사도중 갑자기 서거한 것입니다. 사회적 추모가 일고 <한겨레> 역시 갑자기 비판에서 추모 모드로 바뀌었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겪는 그 혼란스런 감정과 유사할까요. 봉하마을에서 우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어떤 시민은 <한겨레> 기자를 보면 욕을 했고, 어떤 이는 <한겨레> 기자라는 이유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죄송합니다'하고 같이 울어드리는 일 외엔 없었습니다. 봉하마을의 풍경만큼 제 마음도 복잡했습니다. 왜 부패혐의로 조사받던 전직 대통령을 보고 시민들도 울고, 나도 우는 걸까. 그러다 어느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듯 깨닳음이 들어찼습니다. 


‘그렇구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혐의는 혐의이고, 그를 죽음으로까지 내몬 검찰의 의도를 시민들은 구분하고 있는 것이구나. 책임을 물을 것과 죽으라고 떠미는 것은 다른 것인데, 노무현 대통령을 죽으라고 몰아세우기만 했구나. 논두렁 시계라는 있지도 않은 사실들을 언론이 가세해 퍼뜨렸구나. 사람들은 여기에 분노하는 것이구나.’ 로마시대 패배한 검투사는 바로 죽임을 당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죽임을 당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결투는 심판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이루어졌고 패자를 계속 공격하는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정정당당하지 않고 비겁한 행동을 했을 때에만 장내 여론에 따라,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로마시대 패배한 검투사에게만도 못한 책임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물은 것은 아닐까. 진보 언론이 패배한 검투사 더러 제발 죽으라며 검찰과 함께 칼춤을 추는 것이 맞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하늘로 편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봉하마을로 그의 49재 취재를 갔던 때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마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대통령님. 당신을 원망했던 한겨레 기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무엇에 분노했고 시민들이 왜 지금 울고 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의 억울함을 밝혀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겨레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간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비가 오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갰고 옅은 무지개가 봉화산 주변에 흩뿌려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겨레>는 이후 편집국 차원에서 검찰 보도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검찰 수사속보를 받아쓰느라 검증에 소홀하거나 혹여 검찰의 검은 손아귀에서 이용당한 측면은 없는지 철저하게 검증하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것은 모두 기록화되어 지금도 회사에 보관중일 것이니 찾아보십시오. 이후 <한겨레> 국장단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검찰 수사에 대해서만큼은 늘 신중하게 거리두기하며 관찰하게 되는 사풍이 자리잡게 됩니다. 이건 문재인 정부에서 벌어지는 특수한 현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오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회사 바깥에서 또 감정싸움 하듯 논쟁을 번지게 하는 건 아닌가 염려됩니다. 저도 무척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저의 재기를 뒤에서 응원해준 후배들이 너무나 많기에 이 글을 쓰는 지금 저는 가슴이 너무나 아픕니다. 부디 저의 진심을 오해하지 말아주시고, <한겨레>의 미래를 위한 제언으로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러분의 건투 또한 빕니다. 


허재현.





☞아래는 한겨레 기자들의 최근 성명 원문



<한겨레>는 지난 2019년 9월 ‘조국 보도 참사’ 성명을 발표할 때와 견주어 달라진 게 없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성역’ 없이 비판의 칼날을 세웠던 <한겨레>는 조국 사태 이후 ‘권력’을 검증하고 비판하는 데 점점 무뎌지고 있습니다. 청와대나 법무부 관련 의혹 취재는 가장 늦게 시작했으며, 결국 빈손으로 빠져나오기 일쑤였습니다. 최근에는 한발 늦은 취재를 넘어 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운전 중 폭행을 감싸는 기사를 썼다가 오보 사태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결국 현장에서 무기력을 넘어서 열패감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소통이 잘 된다”, “균형 잡힌 보도”라며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 하는 국장단을 향해 절박한 심정으로 현장 기자들의 뜻을 모아 이 성명을 씁니다.


<한겨레>는 문재인 정권의 법무부에 유독 관대했습니다. ‘윤석열 새 혐의…’양승태 문건'으로 조국 재판부 성향 뒷조사'라는 지난해 11월25일자 기사에서는 추 장관의 틀린 주장을 그대로 담기도 했습니다. 이 기사는 “윤석열 검찰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건 재판부의 물의 야기 법관 해당 여부 등을 조사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공개된 문건에 ‘조국 재판부의 물의 야기 법관 여부’와 관련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한겨레>는 침묵했습니다.


현장 분위기와 전혀 다른 무리한 기사 계획이 편집회의 과정에서 만들어져 일방적으로 찍어 내려진 경우도 많았습니다. 법원이 검찰총장 직무배재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한 다음 날인 12월2일 ‘”법원 초토화시킨 장본인인데…” 윤석열 살린 법원 결정에 착잡한 판사들’이라는 기사가 오전 지면계획에 잡혔습니다. 애초 현장 기자들은 ‘법원이 추 장관의 행정권 남용을 제한했다’, ‘재판부의 법리와 양심에 따른 판단이었다’는 판사들의 반응을 묶어 발제했지만, 편집회의를 거치더니 법원 판결로 ‘착잡한 판사’를 앞세우는, 취지가 정반대인 기사안으로 정리된 것입니다. 취재 과정에서 ‘법원이 초토화됐다’거나 ‘법원 결정이 착잡하다’는 판사들의 반응은 극소수였습니다. ‘착잡한 판사들’ 기사는 결국 오후 지면계획에서 빠졌지만, 이 기사가 어떤 이유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현장 기자들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날 편집부에서도 ‘오늘자 1면을 보며’라는 제목의 비판 글을 집배신에 올렸습니다. 윤 총장의 직무배제 집행정지를 인용한 법원 판결을 비롯해 추 장관의 무리한 징계 절차 등을 균형 있게 다루지 못한 지면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감탄고토.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갈수록 염치도 없는 것인지. 정파성 미명하에 저널리즘이 죽어가고 있다”는 의견도 덧붙였습니다. 이는 현장에서 ‘친정부 매체’라고 조롱받는 기자들의 열패감과 비슷했습니다. 그런데도 집배신에까지 올라온 추-윤 사태 관련 항의 글에 대해 국장단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리한 편 들기는 오보로 이어졌습니다. ‘이용구 차관 관련 검찰 수사지침 “목적지 도달 뒤엔 운행 중 아니다”’는 기사는 법조계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에서도 ‘사실과 맥락에 맞지 않는 보도’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경찰이 법무부 차관의 폭행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는 비판 여론이 거센 상황에서 이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었어도 어차피 특가법 적용을 하지 못했다는 여론을 만들기 위해 추미애 라인 검사에게 받은 자료를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받아써 준 결과였습니다. 서초동에선 “추미애 라인 검사가 전날 밤 텔레그램으로 <한겨레>에 기사를 써줄 것을 요구했다”는 찌라시까지 돌았습니다. 현장 기자들은 기사가 나간 뒤 공보관에게 사실관계에 대해 지적을 받고 해당 의견을 법조팀장에게 전달했지만 자료를 준 취재원과 의견이 엇갈린다는 이유로 틀린 사실은 제대로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사실관계가 틀린 자료라는 현장 보고가 수차례 있었음에도 일부 내용만 수정해 이를 지면에까지 실은 이유가 무엇인지 국장단에 묻고 싶습니다.


최근 불거진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의혹’ 또한 공정한 잣대로 보도되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심지어 지난 15일자 지면에 실린 ‘김학의 출국금지, 절차 흠결과 실체적 정의 함께 봐야’라는 제목의 사설은 ‘실체적 정의’를 위해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았던 상황을 옹호하는 논리로 쓰였습니다. 절차적 정의는 결코 훼손될 수 없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입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라는 인물을 떠나 기본권 침해는 최소한의 적법 절차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건 <한겨레>가 지난 30년간 지켜온 가치입니다.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 수사로 김 전 차관이 저지른 죗값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분노와 제대로 된 절차에 따라 김 전 차관을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전혀 상충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국 사태 때부터 지적된 편 들기 식 보도가 이런 사설과 보도를 낳은 본질입니다.


현재 법조 기사들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부끄러움과 책임은 온전히 현장 기자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한겨레>가 어쩌다가 “파시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기사를 쓰게 된 걸까요. <한겨레>가 쓰고 있는 비판 기사 가운데 상대가 아프다고 받아들일 만한 기사는 몇 개나 될까요. 그런데도 데스크들은 “현장 발제가 없다”, “현장 기자들은 식견이 없다”며 논점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사회부장이 지난 11월 열린편집위원회에서 “전통적인 검찰 기사가 아니다 보니 식견 있는 기자들이 볼 수 있다. 일선 취재기자들은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한 말은 데스크가 현장의 목소리를 어떤 논리로 배제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일방적인 찍어 누르기식 발제와 기사 작성 지시 환경에는 현장의 적극적인 발제도 불가능합니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한겨레> 창간사를 다시 되새깁니다. 이해관계를 떠나 틀린 건 틀렸다고 비판하고, 의혹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취재해야 합니다. 국장단의 정확한 판단과 현장 기자들과의 원활한 소통이 좋은 보도를 만듭니다. 데스크에서 구체적인 정황이나 물증 없이 ‘한쪽 편을 드는 기사’를 현장에 요구하며 설명하는 게 소통이 아닙니다. 현장에선 더는 “법무부 기관지”, “추미애 나팔수”라는 비아냥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국장단의 어설픈 정권 감싸기와 모호한 판단으로 ‘좋은 저널리즘’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법조팀도 비슷한 문제 제기를 수차례 해왔지만 전혀 개선된 게 없었습니다. 이는 법조팀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한겨레> 취재기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라는 데에 젊은 기자들의 뜻이 모였습니다. 데스크와 현장 기자들의 생각 격차는 커져만 가는데 국장이 공약으로 내세운 ‘토론단위 확대’ ‘보도 점검 자리’ ‘현장 기자 비상구’ 등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에 <한겨레> 현장 기자들은 국장단과 사회부장, 법조팀장이 해당 기사와 사설에 대한 경위를 밝힌 뒤 그에 따른 합당한 책임을 지고 공식 사과와 재발방지책 마련에 나설 것을 요구합니다. 탁상공론을 넘어, 현장 기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특정 정파·좌우 진영 가릴 것 없이 공정한 잣대로 보도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것인지 구체적인 대책 마련도 함께 요구합니다.




허재현 <리포액트> 대표 기자 repoac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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